러시아 북서부, 핀란드만(灣) 안쪽에 있는 도시.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제정(帝政)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네바강(江) 하구의 101개의 섬과 함께 강 양안(兩岸)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말라야(小)네바강·볼샤야(大)네바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분류에 놓인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정연한 거리는 ‘북방의 수도(水都)’로 불려왔다. 북위 60°의 고위도 지역이면서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1월 평균기온 -7.6℃, 7월 평균기온 18.4℃이며 6∼7월에는 백야(白夜) 현상이 나타난다. 겨울에 네바강과 해안의 바다가 얼지만, 쇄빙선(碎氷船)에 의해 항로는 거의 연중 유지된다. 페테르부르크는 자연 그리고 러시아의 지체에 대한 승리를 의미했다. 처음에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건축으로 시작된 건설은 18, 19세기를 거치며 계속되어 수많은 대로(prospect), 광장, 궁전, 정원, 첨탑, 동상, 운하들로 이루어진 독특한 문화 공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팽창한 ‘커다란 시골’ 모스크바와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과 토목 계획의 기본 원리는 철저하게 ‘합리성’에 의존했다. 당시 사람들은 “마침내 이 도시에 기하학이 당도했다.”고 썼다. 러시아인들에게 모스크바가 어머니이자 ‘심장’과 같다면, 페테르부르크는 ‘머리’, 그것도 ‘차가운’ 아버지의 머리에 해당한다. 이 아버지의 두뇌와 함께 러시아의 근대는 시작되었다. 그곳은 최초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가 생긴 장소이며, 최초의 공공 도서관, 최초의 극장, 최초의 식물원, 평민 자녀를 위한 최초의 학교가 문을 연 장소다.
페테르부르크는 그 자체로 ‘근대’ 러시아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기호였다. 이 도시는 모든 면에서 하나의 도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러시아인을 유럽인으로 개조하기 위한 거의 유토피아적인 방대한 문화 공학의 계획인 것이다. 모스크바적인 ‘중세’를 거부하고 유럽식의 ‘근대’를 도입하는 것, 그러니까 ‘유럽으로 열린 창’인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의 코드를 철저하게 개편함으로써 과거 러시아의 무지하고 후진적인 관습을 버리고 진보적이고 계몽된 근대 서구 세계에 동참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페테르부르크식 근대의 목표였다.
이런 목표하에서, 당대인 18세기 문화의 주체이던 귀족들이 처하게 된 상황은 어땠을까? 말하자면 그건 ‘자신의 고국에서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되는 경험’과도 같았다. 통상적으로 ‘자연적인’ 행위 영역에 해당하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통째로 ‘학습’의 영역으로 바뀌었다고 상상해 보라. 먹고, 입고, 마시고, 인사하는 법과 같은 일상 행위의 모든 규범들을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새롭게 익히고 배워야만 한다! 이런 상황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일상을 ‘연극과도 같은 것’으로 만들었는데, 그들은 말 그대로 ‘항상 무대 위에 선 것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황제 표트르는 이 연극의 대본에 해당하는 소책자를 출간하기도 했는데, 그가 직접 독일어 원서를 개작하고 윤색한 책 《젊은이를 위한 예법》에는 행위 예절에 관한 다양하고 상세한 지시가 들어 있다. ‘항시 외국인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상상할 것’, ‘음식을 뱉거나, 나이프로 이를 쑤시거나, 큰 소리로 코를 풀지 말 것.’
요컨대, 도시 페테르부르크는 18세기 러시아의 새로운 문화적 상황, 곧 이전 시대의 모든 것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와 ‘부정’을 대변한다. 그렇게 ‘갑자기’와 ‘새로운’이라는 두 단어는 18세기 러시아 문화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술어가 된다. 시인 칸테미르의 유명한 구절은 이를 잘 보여 준다. “표트르의 영민한 교시를 소중히 하니, 그로써 우리가 갑자기 이미 새로운 민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세적 신성에 대한 근대적 세속 권력의 승리라는 18세기의 방향 전환은 페테르부르크를 ‘신(新)로마’로 보는 견해에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표트르는 신성의 중심부, 가령 새로운 예루살렘이 되는 대신 최고의 권력적 전통을 따르는 길을 택했고, 그건 바로 페테르부르크를 ‘신로마’로 표상하는 길이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도시 문장은 바티칸의 문장에서 따왔다. 이와 관련해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명을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주지하듯이 표트르는 ‘베드로’의 러시아식 이름이며, 따라서 ‘성스러운 베드로의 도시’는 곧 ‘표트르의 도시’이기도 하다.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명칭은 Saint라는 수식어가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독일식 명칭인 Sankt Petersburg가 문법적으로 소유격을 포함해 성스러운 Peter의 도시라는 뜻을 갖는다면, 러시아에 수용된 형태인 Sankt Peterburg는 소유격이 누락되어 앞의 의미가 모호해지므로 ‘표트르의 신성한 도시’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에 내포된 두 의미 중에서 ‘표트르의 의미론’이 ‘베드로의 의미론’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제국 로마의 지향성이 점차 황제 표트르에 대한 개인 숭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흔히 ‘표트르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지는 제국의 새 수도는, 앞서 말했듯이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상식을 벗어나는 예외적인 선택이었다. 영토의 중심부에 수도를 정하는 일반적 관계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예 영토의 바깥에 새로운 중심을 정하는 극단적인 사례였다.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Yuri Lotman)은 이를 도시 공간의 지리적 배치에 관한 유형학으로 동심적(centric) 모델과 이심적(eccentric) 모델로 설명한다.
우선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와의 관계에서 ‘중심’의 위상을 부여받는 동심적 모델의 경우, 통상 “대지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우주 자체의 이상화된 모델이 된다. 흔히 ‘천상 도시의 원형’이나 ‘주변 세계를 위한 성소(聖所)’로서 나타나는 이 모델의 대표적인 예로는, 로마, 예루살렘, 모스크바 등이 있다. 당연히 이 모델은 열림보다는 닫힘, 즉 ‘적대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주변 세계로부터의 분리’를 지향한다.
한편 도시는 대지와의 관계에서 이심적으로, 그러니까 ‘경계 너머에’ 자리할 수도 있다. 스뱌토슬라프, 샤를대제, 무엇보다 표트르대제의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데, 동심적 모델의 폐쇄성과 비교했을 때, 이심적 구조는 열림과 해체, 개방된 ‘문화적 접촉’을 지향한다. 동심적 모델이 대개 땅과 하늘의 중개자로 표상되는 ‘고산도시’의 이미지와 관련된다면, 이심적 구조는 문화 공간의 변경, 예컨대 ‘해안이나 강어귀’에 위치한다. 주로 창조와 관련된 신화를 통해 ‘하늘과 땅의 대립’을 활성화하는 전자에 비해, 후자는 ‘인공 대 자연의 대립’을 강조한다. 특히 홍수나 범람 등의 자연력에 의해 도시의 인공성이 몰락하게 되는 이야기들, 종말론의 신화, 멸망의 예언은 후자를 특징짓는 자질들이다.1)
실제로 페테르부르크는 이심적 모델의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언젠가 이 인공의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불길한 종말론의 신화는 어쩌면 페테르부르크의 첫 삽이 떠지던 그 시점부터 이미 도시의 실제 역사를 뒤덮고 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실제 역사는 신화적 요소로 점철돼 있는데, ‘유언비어’나 ‘구전야사’ 등의 형태로 민중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페테르부르크의 이런 뿌리 깊은 신화학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그 원천적 발효소는 도시 건설이 수반한 끔찍한 희생의 상처를 표현해 주는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더 포괄적인 원인은 페테르부르크로 대변되는 18세기 러시아의 문화적 기호, 곧 ‘역사의 부재’라는 기호로 봐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표트르 시대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갑자기, 새로워진 러시아”, 즉 18세기 초반 러시아가 체험하고 있던 것을 하나의 ‘출발점’ 혹은 ‘시작’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었다. 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는 무엇인가? “그 이전의 모든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최소한 역사적 현실성을 결여한 무지와 혼돈의 시대에 속하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2) 다시 말해, 표트르 시대 이전의 러시아는 ‘무(엔트로피)’로 간주되며, 이상적인 러시아는 지나간 것과 무관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역사 부재’의 상황은 자연스럽게 신화의 맹렬한 성장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기호적인 진공 상태를 가득 메운 것은 다름 아닌 ‘신화’였는데, 인공적인 도시의 상황은 전적으로 신화소적으로 되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와 신화의 이와 같은 ‘몸 섞기’가 단지 신화적 이야깃거리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탄생 이후 거의 곧바로 이 도시는 자신의 허구적 분신, 그러니까 도시의 이미지와 자기인식에 영향을 끼치는 자신의 ‘쌍둥이’를 갖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 페테르부르크(literary Petersburg)”다. 그것은 단순히 도시의 예술적 ‘반영’이 아니라 우리가 푸시킨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섬뜩한 ‘분신(alter-ego)’의 캐릭터에 해당한다. |